경제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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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돈 없어도 '명당' 상가 주인?…청년·소상공인에 국유재산 '추첨' 분양 길 열렸다

 기획재정부가 국가 소유의 땅이나 건물을 국민이 더 쉽게 빌려 쓰고, 특히 청년과 소상공인 같은 사회적 약자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제도 개선에 나섰다. 지난 8월 발표한 국유재산 종합계획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으로, 관련 법 시행령 개정안을 마련해 내년 상반기 시행을 목표로 본격적인 절차에 들어간 것이다. 이번 개편의 핵심은 그동안 높은 임대료와 복잡한 절차 때문에 국유재산을 활용하기 어려웠던 계층에게 문턱을 대폭 낮춰, 창업의 기회를 제공하고 생계의 기반을 다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국가 재산을 단순히 관리하고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국민의 삶을 지원하는 적극적인 도구로 활용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적 의지가 담겨있다.

 

이번 개정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청년, 다자녀 양육자, 소상공인 등에 대한 파격적인 대부 조건 완화다. 앞으로 이들은 최고가 경쟁입찰 방식이 아닌, 자격 요건만 갖추면 참여할 수 있는 '제한경쟁'을 통해 국유재산을 빌릴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경쟁이 붙을 경우, 추첨을 통해 사용자를 선정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자본이 부족한 청년이나 소상공인도 좋은 조건의 국유지를 확보할 기회를 얻게 됐다. 임대료 부담은 거의 없는 수준으로 낮아진다. 청년, 청년창업기업, 다자녀 양육자의 경우 기존에 재산가액의 5%에 달했던 대부료율을 1%로 대폭 인하한다. 사회적 경제조직 역시 기존 2.5%에서 1%로 부담을 줄였고, 소상공인에 대한 한시적 대부료 감면 조치는 2026년까지 연장하여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기로 했다.

 


국민 편의를 높이고 행정 절차를 간소화하기 위한 세심한 개선책도 여럿 포함됐다. 우선 연간 대부료가 50만 원 이하인 소액 계약의 경우, 매년 번거롭게 나눠 낼 필요 없이 계약 기간 전체의 대부료를 한 번에 납부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기존 20만 원 이하였던 기준을 현실에 맞게 상향 조정한 것이다. 또한, 태풍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으로 임차한 국유재산에 피해가 발생했을 때, 임차인이 자기 비용으로 수리했다면 그 비용만큼 대부료를 감면받을 수 있는데, 기존에는 단 1회만 가능했던 혜택을 횟수 제한 없이 받을 수 있도록 바꿔 갑작스러운 재난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었다. 대부료가 연체되었을 때 관리기관이 15일 이내에 의무적으로 고지하도록 하여, 사용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체금이 불어나는 것을 막는 장치도 마련했다.

 

이 밖에도 제도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허점을 보완하는 조치들이 함께 추진된다. 공중이나 지하 공간을 장기간 사용할 때 내는 사용료의 산정 방식을 합리적으로 개선하고, 국가 소유 건물과 지자체 소유 건물을 맞바꿀 때 복잡한 감정평가 대신 시가표준액으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세금 대신 주식으로 물납받은 비상장주식을 처분할 때, 기존 주주 등에게 우선 매수할 기회를 주는 기간도 기존 1년에서 3년으로 넉넉하게 늘렸다. 정부는 오는 12월 22일까지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 뒤, 법제처 심사와 국무회의 등을 거쳐 내년 상반기 중 개정안을 확정 및 시행할 방침이며, 앞으로도 국유재산이 국민의 삶에 실질적인 보탬이 되도록 지속해서 제도를 개선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日軍이 총 쏘자 ‘피땀’ 흘렸다는 비석…방치된 이순신 최후의 보루에 가보니

던 이유는 단 하나, 수백 척의 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조선 수군의 전력이 고작 13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라도 사람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라"는 잔혹한 명령 아래 전라도 전역은 초토화되고 있었고, 이순신은 함대를 보존하고 재건할 안전한 근거지가 절실했다. 법성포, 고군산도를 전전하고 우수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폐허가 된 뒤였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육지와 멀어 전략적으로 부적합했던 안편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이곳은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군량 조달이 용이하고,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에 배를 만들 소나무까지 풍부해 수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하도에 닻을 내린 이순신은 곧바로 기적과도 같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집과 군량 창고를 짓고, 길이 1km, 높이 2m의 석성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군량미 확보와 함대 증강이었다. 피란민들의 배에 실린 곡식을 군량미로 바꾸는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해 단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 구리와 쇠로 대포를 만들고, 섬의 풍부한 소나무를 베어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했다. 그 결과 13척에 불과했던 함대는 53척으로 늘어났고, 흩어졌던 장수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1천 명이던 병력은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이 불과 100여 일 만에 다시금 막강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오늘날 고하도는 이순신의 처절했던 재건의 역사 위에 화려한 현대적 관광 시설을 덧입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을 넘어서면 목포 앞바다와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에 내리면 13척의 판옥선을 격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의 전망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용머리 해안을 따라서는 1818m 길이의 아름다운 해상데크가 쪽빛 바다 위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해안 절벽을 수놓는 노란 들국화의 군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지만, 이곳이 패배의 벼랑 끝에서 조선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고하도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22년 세워진 기념비와 모충각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당시 수군의 심장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복원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총을 쏘자 비석이 몇 달간 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둘레길만 둘러볼 뿐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재기의 땅,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조속한 복원을 통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모든 국민이 찾는 역사의 순례길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