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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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탄핵 막겠다며 헌재에 '글 폭탄'…알고 보니 30대 무직·회사원 남성이 주도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당시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여론을 조작하려 한 이들이 무더기로 검찰에 넘겨졌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정보통신망법 위반 혐의로 38세 남성 A씨 등 총 58명을 입건해 조사한 뒤, 지난달 31일 전원을 불구속 상태로 검찰에 송치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들은 헌법재판소의 '국민의 목소리' 게시판에 윤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내용의 게시글을 무려 23만 건 이상 자동으로 게시하는 방식으로 헌재의 업무를 심각하게 방해한 혐의를 받는다. 이번 사건은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동화된 프로그램을 동원해 여론을 왜곡하려 한 시도가 수사기관에 의해 적발되어 사법 처리 절차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그 파장이 예상된다.

 

경찰 조사 결과, 이번 사건을 주도한 인물은 A씨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지난 3월경 온라인 커뮤니티인 '디시인사이드 국민의힘 갤러리'에 ‘헌재 자유게시판 탄핵 반대 ‘딸깍’으로 끝내기’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을 올리며, 자신이 직접 제작한 매크로 프로그램의 다운로드 링크를 유포했다. A씨 스스로도 이 프로그램을 이용해 무려 4만 4000여 건의 게시글을 헌재 홈페이지에 도배했으며, 그가 공유한 링크를 통해 범행에 가담한 57명 역시 총 19만 건에 달하는 글을 반복적으로 게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무차별적인 '게시글 폭탄'으로 인해 헌법재판소 홈페이지 게시판은 접속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등 실질적인 업무 방해 피해가 발생했다. 경찰은 A씨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범행에 사용된 매크로의 소스코드 등을 확보해 증거를 확보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들의 인적 구성 또한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전체 58명 중 절반에 가까운 30명이 30대였으며, 20대가 16명으로 그 뒤를 이어 2030세대가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0대는 9명, 50대는 3명 순이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뚜렷한 직업이 없는 무직이 21명으로 가장 많았고, 평범한 회사원이 19명, 자영업자 7명, 전문직 5명, 학생 4명 순으로 집계됐다. 이는 특정 집단이 아닌 다양한 연령과 직업을 가진 일반인들이 온라인상에서의 선동을 통해 조직적인 여론 조작 범죄에 쉽게 가담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온라인 여론 왜곡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일깨우고 있다.

 

경찰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온라인 공간의 질서를 교란하는 매크로 악용 범죄에 대해 더욱 엄정하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번 사건과 같은 정치·정책 관련 여론 조작 행위는 물론, 공연 티켓 예매 등 국민 생활과 밀접한 영역에서 매크로를 악용하는 각종 부정행위에 대해서도 끝까지 추적해 철저히 형사 책임을 묻겠다"고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전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벌어진 대규모 여론 조작 시도가 사법적 심판을 앞두게 되면서, 표현의 자유를 넘어선 불법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日軍이 총 쏘자 ‘피땀’ 흘렸다는 비석…방치된 이순신 최후의 보루에 가보니

던 이유는 단 하나, 수백 척의 왜군에 맞서 싸워야 할 조선 수군의 전력이 고작 13척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라도 사람을 모조리 죽여 씨를 말리라"는 잔혹한 명령 아래 전라도 전역은 초토화되고 있었고, 이순신은 함대를 보존하고 재건할 안전한 근거지가 절실했다. 법성포, 고군산도를 전전하고 우수영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폐허가 된 뒤였다. 시야 확보가 어렵고 육지와 멀어 전략적으로 부적합했던 안편도를 거쳐 마침내 도달한 곳이 바로 고하도였다. 이곳은 영산강 하구에 위치해 군량 조달이 용이하고, 북서풍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에 배를 만들 소나무까지 풍부해 수군 재건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고하도에 닻을 내린 이순신은 곧바로 기적과도 같은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도착하자마자 집과 군량 창고를 짓고, 길이 1km, 높이 2m의 석성을 쌓아 방어 태세를 갖췄다. 가장 놀라운 것은 군량미 확보와 함대 증강이었다. 피란민들의 배에 실린 곡식을 군량미로 바꾸는 ‘해로통행첩’ 제도를 시행해 단 열흘 만에 1만 석의 군량미를 비축했다. 동시에 백성들을 모아 구리와 쇠로 대포를 만들고, 섬의 풍부한 소나무를 베어 40여 척의 전선을 건조했다. 그 결과 13척에 불과했던 함대는 53척으로 늘어났고, 흩어졌던 장수와 병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1천 명이던 병력은 2천 명으로 불어났다. 원균의 칠천량 패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갔던 조선 수군이 불과 100여 일 만에 다시금 막강한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이다.오늘날 고하도는 이순신의 처절했던 재건의 역사 위에 화려한 현대적 관광 시설을 덧입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유달산 정상을 넘어서면 목포 앞바다와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에 내리면 13척의 판옥선을 격자 모양으로 쌓아 올린 독특한 형태의 전망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용머리 해안을 따라서는 1818m 길이의 아름다운 해상데크가 쪽빛 바다 위로 이어진다. 가을이면 해안 절벽을 수놓는 노란 들국화의 군락은 탄성을 자아낸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사진을 찍고 둘레길을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지만, 이곳이 패배의 벼랑 끝에서 조선의 운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역사의 심장부였음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이처럼 고하도는 아름다운 순례길 이전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의 현장이지만, 그 가치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이순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722년 세워진 기념비와 모충각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당시 수군의 심장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복원되지 못한 채 그 터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총을 쏘자 비석이 몇 달간 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둘레길만 둘러볼 뿐 이곳을 스쳐 지나간다. 노량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한 재기의 땅, 고하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조속한 복원을 통해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모든 국민이 찾는 역사의 순례길로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