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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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현산'이라 부른 그곳, 200년 뒤 한 사진작가가 포착한 '검은 눈물'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순택이 한국 사회의 첨예한 갈등 현장을 벗어나 멀고 짙은 섬, 흑산도로 향했다. 서울 사직동 ‘공간풀숲’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흑산, 멀고 짙고’는 흑백 필름에 담아낸 신작 80여 점을 통해 섬의 깊은 서사를 펼쳐 보인다. 1801년 정약전이 유배되었던 비극의 땅이자, 동생 정약용이 그 참담함을 위로하고자 신비로운 검정을 뜻하는 ‘현산(玆山)’이라 부르고자 했던 바로 그곳. 작가는 푸르다 못해 검푸른 바다 때문에 이름 붙여진 이 섬의 외형적 검정(黑)을 넘어, 그 안에 깃든 다층적인 삶과 시간의 흔적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며 1만 5천 자에 달하는 작업 노트와 함께 관객에게 제시한다.

 

전시의 중심에는 흑산도의 절경을 담은 ‘팔폭병풍’이 자리한다. 병풍처럼 길게 이어지면서도 각 폭이 독립된 장면으로 분절되는 이 작품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끝내 고립된 신안 바다 섬들의 숙명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다. 사진 속 흑산의 바다는 칠흑 같은 어둠과 거친 물살로 보는 이를 압도하지만, 그 모진 파도를 묵묵히 견뎌내는 검은 바위와 그 위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새와 산양의 모습은 강인한 생명력과 경외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망망대해 한가운데 선 섬의 풍광에서 시작해 그곳에 깃든 동물들의 삶으로 시선을 확장하며, 인간의 시선 너머에 존재하는 섬의 원초적 풍경을 그려낸다.

 


작가의 렌즈는 이내 섬의 진짜 주인인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흑산도 진리마을에서 만난 이판덕 할머니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굽은 허리를 이끌고 파래와 미역을 딴다. 작가는 오랜 노동으로 굳어버린 할머니의 등이 마치 바가지 안의 먹거리를 향해 올리는 ‘거룩한 기도’처럼 보였다고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곤촌마을의 우럭 양식장에서 일하는 스리랑카 노동자 두싼 왈폴라의 고뇌도 담담하게 포착한다. 4년 10개월을 일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흑산도를 찾았지만, 내년 1월이면 또다시 떠나야 하는 그의 막막한 현실은 이제 그를 대체할 노동자를 구해야 하는 섬의 현실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노순택은 ‘분단의 향기’, ‘비상국가’ 등의 작업을 통해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 사진가다. 2014년 사진작가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그가 이번에는 흑산도라는 구체적인 공간과 그곳 사람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의 카메라는 단순히 섬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고단한 삶을 연민의 시선으로 담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한평생 물질을 해온 노인과 잠시 머물다 떠나야 하는 이방인 노동자의 사연을 병치하며, 연결과 고립, 토착과 이주, 자연과 문명이 교차하는 ‘오늘의 흑산도’가 품은 복잡하고도 생생한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맥도날드 저격'하며 태어난 그 운동, 미국 한복판에서 화려하게 부활하다

임의 중심에 미국 캘리포니아의 주도, 새크라멘토가 떠오르고 있다. ‘성스러운 강’이라는 이름의 이 도시는 ‘팜 투 포크(Farm-to-Fork, 농장에서 식탁까지)’라는 슬로건을 도시의 정체성으로 내걸었다. 1986년 이탈리아에서 맥도날드에 대항하며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의 정신을 미국 서부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해낸 것이다. 그 결과는 놀라워서, 슬로푸드 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테라 마드레(어머니의 땅)’ 축제가 사상 처음으로 이탈리아 밖인 바로 이곳 새크라멘토에서 열리는 영광으로 이어졌다. 이는 새크라멘토가 단순한 미식 도시를 넘어, 패스트푸드로 상징되는 현대 문명에 맞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제시하는 세계적인 구심점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사건이다.새크라멘토가 이처럼 ‘미국의 팜 투 포크 수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천혜의 자연환경이 있다. 역설적이게도 1852년의 대홍수가 시에라산맥의 비옥한 퇴적물을 센트럴밸리 전역으로 실어 날랐고, 새크라멘토강과 아메리카강이 만나는 풍부한 수량, 강렬한 햇살과 서늘한 저녁 기후가 더해져 농사를 위한 최적의 땅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도시 반경 100km 안에서 거의 모든 식자재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요리사의 천국’이 탄생했다. 전 세계 아몬드 생산량의 90% 이상, 세계 3대 자포니카 쌀 생산지, 미국 최대 캐비어 양식장이 이곳에 있으며, 토마토, 올리브, 와인 등도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물이다. 파머스마켓에 들어서는 순간, 숯불 위에서 구워지는 패티와 갓 구운 빵, 신선한 농작물이 뒤섞여 뿜어내는 풍요로운 향기는 이 도시가 가진 땅의 힘을 오감으로 느끼게 한다.이처럼 거대한 농지가 세계적인 미식 도시로 탈바꿈한 데에는 몇몇 선구자들의 ‘가벼운 우연’과 ‘열정적인 모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0년대, 이민 2세대 농부였던 레이 융이 우연히 얻은 둥근 토마토 씨앗을 심었다가 밭 전체를 뒤덮자, 처리를 위해 현지 레스토랑에 직접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 ‘팜(농장)’에서 ‘포크(식탁)’로 이어지는 직거래 문화의 시초가 되었다. 여기에 ‘요리계의 인디애나 존스’로 불린 식료품점 아들 대릴 코르티가 가세했다. 그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누비며 당시 미국에는 생소했던 파르메산 치즈, 트러플, 발사믹 식초 등을 들여와 새크라멘토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이들의 노력이 씨앗이 되어 2012년, 케빈 존슨 전 시장은 새크라멘토를 ‘미국 팜 투 포크 운동의 수도’로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새크라멘토의 철학은 결국 ‘시간의 회복’으로 귀결된다. 세계적인 셰프 엘리자베스 포크너는 테라 마드레 행사에서 “내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패스트푸드”라며, 아이들의 ‘인앤아웃 햄버거’ 타령에 씁쓸해했다. 그녀에게 패스트푸드와의 싸움은 곧 자신의 요리를 지속하게 하는 동력이다. 포크너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현지 농부와 어부를 직접 만나 제철 식재료를 확인하는 것을 요리의 첫걸음으로 삼는다. 이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기술을 넘어, 생산자와의 관계를 맺고 자연의 리듬을 존중하는 슬로푸드의 핵심 가치와 맞닿아 있다. 멕시코계, 아프가니스탄계 이민자들이 기른 작물이 스페인 음식에 매료된 요리사의 손에서 파에야로 재탄생하는 새크라멘토의 식탁은, 결국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엮여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시간’ 그 자체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