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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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여는 순간 1차 대전 참호 속…이 연극, 미쳤다는 말밖에

 극장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1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으로 소환된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관객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전쟁의 참상을 바로 곁에서 목격하는 증인으로 만든다. 비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 다다른 공연장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의미한 좁은 벙커(참호) 그 자체다. 탄약 박스와 투박한 테이블이 전부인 공간,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총성과 배우들의 절규 속에서 관객은 숨 막히는 긴장감과 함께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독특한 몰입감은 <벙커 트릴로지>가 단순한 연극을 넘어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되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벙커 트릴로지>는 하나의 벙커를 배경으로, 세 편의 고전(<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연작 공연이다. 각각 '아서 왕의 전설', 그리스 비극 '아가멤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원작으로 삼지만,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아 어느 것을 먼저 보아도 무방하다. 그중 <아가멤논>은 최전방 저격수의 시선을 통해 전쟁이 한 인간의 삶과 내면을 어떻게 잠식해 나가는지를 처절하게 그려낸다. 무대 위 저격수에게 표적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기계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이며,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는 무감각한 동작에 가깝다. 그는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하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인간성을 마모시킨다. 동시에 전쟁은 그가 떠나온 가정까지 파고든다. 그의 부재와 침묵은 결국 가정의 파국을 불러오고, 그가 적에게 명중시킨 총알은 부메랑처럼 날아와 그 자신과 가족의 심장을 꿰뚫는다.

 


<모르가나>와 <맥베스> 역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의 비극을 파고든다. <모르가나>는 '아서', '랜슬롯' 등 원탁의 기사 이름을 별명으로 가진 세 친구가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환상에 기대는 모습을 그린다. 총알이 빗발치는 참혹한 현실을 견디기 위해 아서 왕의 전설이라는 허구의 세계에 빠져드는 젊은 병사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전쟁의 끔찍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반면 <맥베스>는 종전을 바로 앞둔 상황, 지도자의 광기 어린 집착이 어떻게 무의미한 희생을 만들어내는지를 폭로한다. 종전 축하 파티에서 상연되는 연극 '맥베스'와 참호 속 실제 상황을 교차시키며, 권력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빚어내는 파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세 작품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의 밀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모두 관람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연결고리를 통해 연작의 매력을 극대화한다. 영국 극작가 제스로 컴튼의 원작을 바탕으로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가 완성한 국내 라이선스 공연은 2016년과 2018년에도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다. 6년 만에 돌아온 이번 시즌 역시 티켓 오픈과 동시에 매진 행렬을 이어가며 그 명성을 입증하고 있다. 전쟁의 비극을 책이나 스크린이 아닌, 살갗으로 느끼게 하는 이 특별한 연극은 오는 3월 2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관객들을 기다린다.

 

'왕과 사는 남자' 흥행 돌풍, 영월 단종문화제로 이어진다

향으로 단종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가운데, 오는 4월 24일부터 사흘간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일대에서 제59회 단종문화제가 막을 올린다. 이번 축제는 영화를 통해 단종의 서사를 접한 국내외 관람객들이 대거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단순한 지역 행사를 넘어 한국의 전통과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글로벌 문화 축제로 격상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질 예정이다.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첫날에는 영화 속 비극의 시작점을 재현한 '청령포 유배행사'가 새롭게 도입되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단종이 나룻배를 타고 고립된 섬 청령포로 들어가는 장면은 한 나라의 군주에서 유배인으로 전락하는 운명의 변곡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축제의 몰입감을 극대화한다. 같은 날 저녁에는 정순왕후 선발대회와 화려한 드론쇼가 밤하늘을 수놓으며, 특히 영화를 연출한 장항준 감독이 직접 강연자로 나서 영화 제작 뒷이야기와 단종의 역사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풀어내며 축제의 열기를 더할 것으로 보인다.둘째 날인 25일에는 조선 왕실의 품격과 슬픈 역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대규모 재현 행사들이 이어진다. 생이별해야 했던 단종과 정순왕후의 넋을 기리는 가례 행사는 철저한 고증을 거친 조선 왕실 혼례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며 두 사람의 영적인 결합을 상징한다. 이어지는 단종국장은 이번 축제의 정점으로,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국장을 치르지 못했던 단종에게 뒤늦게나마 왕으로서의 예우를 갖추는 의식이다. 관풍헌에서 장릉까지 이어지는 장엄한 국장 행렬은 관람객들에게 역사적 정의와 예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가족 단위 방문객들을 위한 참여형 프로그램도 풍성하게 마련되어 축제의 외연을 넓혔다. 어린이들이 직접 선비가 되어 실력을 겨루는 단종 과거시험과 깨비 명랑운동회 등은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역사 축제에 활기찬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또한 영월의 청정 특산물을 활용해 왕실의 음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단종의 미식제'는 방문객들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역사를 단순히 공부하는 대상이 아니라 맛보고 즐기는 입체적인 경험으로 승화시키려는 영월군의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축제의 마지막 날인 26일은 지역 공동체의 결속력을 보여주는 무형유산 행사들로 대미를 장식한다. 강원도 특유의 역동성이 담긴 칡줄다리기와 칡줄행렬은 주민과 관광객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을 연출한다. 특히 영화에서 영월군수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박지환 배우가 행렬에 동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팬들의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영화 속 인물이 현실의 축제 현장에 나타나 전통 행사를 함께하는 모습은 대중문화와 전통문화가 만나는 가장 이상적인 협업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올해 단종문화제는 영화라는 강력한 매개체를 통해 박제된 역사를 생생한 문화 콘텐츠로 부활시키는 데 성공한 모습이다. 영월군은 이번 행사를 통해 단종이 지닌 유배와 그리움, 그리고 충절의 서사를 세계적인 보편 가치로 확산시키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다. 영화의 감동을 가슴에 품고 영월을 찾은 수많은 발길은 장릉과 청령포의 굽이치는 물줄기를 따라 흐르며, 500여 년 전 어린 왕이 남긴 슬픈 이야기가 어떻게 현대의 찬란한 문화유산으로 재탄생했는지를 직접 목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