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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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엽 안무가, 무용수 삶을 수묵화로 빚다

 뿌연 족자가 서서히 열리면 무대 위에는 먹의 농담으로 빚어낸 듯한 능선이 살아 움직인다. 국립무용단의 '몽유도원무'는 단순히 안견의 그림을 무대화한 것을 넘어, 무용수 한 사람 한 사람이 붓이 되어 각자의 생의 궤적을 그려내는 한 폭의 거대한 수묵화다. 이 작품에서 춤은 정해진 동작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수행이 아니라, 안무가와 무용수가 나눈 수많은 대화와 침묵의 기록이 몸의 언어로 치환된 결과물이다. 안무가 차진엽은 무용수의 몸짓 이전에 그들이 살아온 삶의 조각들에 주목하며, 희로애락이 스민 인간 본연의 모습을 무대 위로 끌어올렸다.

 

차진엽 안무가에게 이번 세 번째 시즌은 과거의 춤을 재현하는 자리가 아닌, 무용수들의 변화된 내면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이다. 그는 안무의 본질이 결국 '사람' 그 자체에 있다고 믿으며, 무용수 개개인의 경험과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을 춤의 핵심 동력으로 삼는다. 연습실에서 안무가와 무용수들은 동작을 익히기 전 서로의 상태를 묻고 답하며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쌓는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무용수들이 단순히 짜여진 틀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몸으로 꺼내는 주체적인 주인공이 되도록 이끈다.

 


이번 시즌에 새롭게 합류한 단원들은 기존의 수직적인 연습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경험에 놀라움을 표하고 있다. 연습의 시작은 경직된 근육을 푸는 루틴이 아니라, 서로의 숨을 나누고 현재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이완의 과정에서 출발한다. 차진엽은 연습실을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지대로 구축함으로써 무용수들이 스스로의 불안과 어둠까지도 춤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정성스러운 접근은 무용수들이 자신의 몸과 춤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무용수들에게 '몽유도원무'는 매번 다시 시작해야 하는 낯설고도 흥미로운 작업이다.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는 자신의 내면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던 베테랑 단원들조차 매 순간 새로움을 느낀다. 계산된 감정이 아닌, 안무가가 다져놓은 자유로운 터전 위에서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몸의 언어는 관객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반복되는 공연 속에서도 고착되지 않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진화하는 점이 이 작품을 국립무용단의 독보적인 레퍼토리로 만든 비결이다.

 


작품 속에서 굽이치는 계곡과 능선은 곧 우리네 삶의 굴곡을 상징한다. 성취와 좌절, 행복과 불행이라는 상반된 가치들이 먹이 번지듯 서로에게 스며들며 모순적인 삶의 계절들을 완성해 나간다. 무용수들은 서로를 돌보고 신뢰하는 과정을 통해 춤의 기술적 완성도를 넘어선 정서적 깊이를 획득한다. 무대 위에서 나누는 터치와 스킨십은 언어 이상의 소통 수단이 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무용수들의 진심 어린 고백을 목격하게 만든다.

 

국립무용단의 '몽유도원무'는 한국 무용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평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의 미학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대 위 인간의 존엄과 개별적인 서사를 존중하는 안무 철학이 돋보인다. 삶과 죽음,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무대 위에서 무용수들은 오늘도 각자의 몽유도원을 향해 정성스러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들의 춤은 관객들에게 단순한 감상을 넘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깊은 사유의 시간을 선사하며 2026년 공연계의 가장 빛나는 성취로 기록되고 있다.

 

해남 도솔암, 일출·일몰 한자리서 보는 '둘레길 명당'

고 북쪽 접경지역의 DMZ 평화의 길까지 연결된 이 거대한 길은 단순히 물리적인 선을 넘어선다. 오랫동안 끊겨 있던 해안 오솔길과 구불구불한 논두렁, 포구의 둑길을 하나로 이으며 국토가 간직해 온 유구한 역사와 인문학적 가치를 복원해내는 작업이다. 도보 여행자들은 이 길 위에서 우리 땅의 숨결을 가장 가까이서 느끼며 느림의 미학을 실천한다.아득한 전체 구간 중에서도 전남 강진과 해남을 관통하는 지점은 코리아둘레길의 백미로 꼽힌다. 이곳은 남해안을 따라온 남파랑길이 마무리되고, 서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서해랑길이 새롭게 시작되는 상징적인 장소다. 대륙의 끝이자 바다의 시작인 이곳에서 여행자들은 비로소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과 정체성을 온몸으로 체감한다.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이 구간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 이들이나 새로운 다짐이 필요한 여행객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장소로 명성이 높다.해남의 도솔암은 이 여정에서 반드시 들러야 할 명당 중 하나다. 기암괴석 사이에 위태로운 듯 평온하게 자리 잡은 이 암자는 일출과 일몰을 한자리에서 모두 감상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새벽녘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과 저녁 무렵 서해로 잦아드는 낙조를 동시에 품을 수 있다는 점은 도보 여행자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한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서 마주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은 코리아둘레길이 선사하는 최고의 보상 중 하나다.인문학적 깊이를 더해주는 강진의 다산초당 역시 둘레길의 핵심 거점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 생활 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기며 학문을 닦았던 이곳은 남도 길에 서린 고단한 역사와 선비 정신을 상징한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 초당에 들어서면 선생이 직접 판 연못과 바위에 새긴 글귀들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길은 단순히 걷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과거의 인물과 대화하며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사유의 공간으로 확장된다.코리아둘레길의 완성은 지역 경제와 문화 보존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소외되었던 작은 포구와 마을들이 길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활력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지자체는 둘레길 이용객들을 위해 낡은 민박을 정비하고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걷기 도시락'을 개발하는 등 손님맞이에 한창이다. 여행자들은 길 위에서 만나는 주민들의 따뜻한 인심과 소박한 풍경을 통해 우리 국토에 대한 애착을 더욱 키워나간다.국토의 실핏줄을 따라 걷는 이 여정은 이제 전 국민의 버킷리스트로 자리 잡고 있다. 해안선을 따라 쉼 없이 이어지는 파도 소리와 산등성이를 타고 넘어오는 바람은 걷는 이의 피로를 씻어준다. 남파랑길의 끝자락에서 서해랑길의 첫발을 내딛는 순간, 여행자는 비로소 한반도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일원임을 깨닫게 된다. 4,500km의 길 위에 새겨진 수많은 발자국은 오늘도 우리 국토의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가며 다음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