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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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다섯에 서예, 예순에 문인화…박병선 화가의 30년 기록

 “그림을 좋아하거나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아이들이 하나둘 떠나고 제 시간이 생기면서 취미로 시작했는데, 먹을 갈고 붓을 움직이는 과정이 재미있고 보람 있더라고요.”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붓을 놓지 않는 문인화가 금정(錦丁) 박병선씨(89)가 구순을 기념하는 회고전 ‘예순에 든 붓, 서른 해의 기록’을 연다. 전시는 15일부터 18일까지 제주시에 있는 돌담갤러리에서 진행된다. 쉰다섯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뒤 예순부터 본격적으로 문인화를 그려온 박씨가 약 30년간 이어온 작품 활동을 되돌아보는 자리다. 

 

1936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박씨는 해방 직후인 1945년 가족과 함께 제주로 돌아왔다. 이번 전시가 열리는 장소는 그가 열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어린 시절을 보낸 옛집 터다. 약 80년 전 추억이 깃든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이번 회고전은 박씨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박씨의 그림 인생은 처음부터 계획된 길이 아니었다. 여섯 남매를 키우며 가정을 돌보는 동안에는 자신의 취미나 관심사를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 막내딸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자녀들이 차례로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면서 비로소 자신만의 시간이 생겼다.

 

새로운 취미를 찾던 박씨는 친구의 권유로 문인화를 접했다. 제주 향토음식 명인 김지순씨가 건넨 제안이 계기였다. 특별히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자신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붓을 들고 먹을 갈며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꼈다.

 

박씨는 먼저 서예를 배운 뒤 문인화에 입문했다. 서예는 석산 강창화 선생에게, 문인화는 치련 허의득 선생에게 사사했다. 이후 허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인 소석 구지회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구 선생은 박씨를 지도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제주를 찾았다.

 

박씨의 딸인 고은숙 전 제주관광공사 사장은 어머니가 처음부터 예술가를 꿈꿨던 것은 아니라고 회상했다. 그는 “어머니는 그전까지 그림을 직접 그려본 적이 거의 없었고, 특별히 예술가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으셨다”며 “아이들을 키우느라 바쁘게 살다가 자녀들이 독립하면서 시간이 생겼고, 친구를 따라갔다가 시작한 일이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된 배경에는 구순을 맞아 어머니의 작품을 정리하고 그동안의 시간을 돌아보게 하려는 가족들의 마음이 담겼다. 고 전 사장은 “구순잔치를 하는 것보다 구순에 전시회를 여는 게 의미 있을 것 같아 권유했다”며 “최근 건강 문제로 입원과 응급실 방문을 겪으면서 전시를 열 수 있을지도 확신하기 어려웠지만, 구순을 맞아 그동안의 작품을 정리하자는 의미로 뜻을 모았다”고 설명했다. 

 

붓을 잡은 뒤 박씨의 삶에는 작품뿐 아니라 새로운 인연도 더해졌다. 그림을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교류하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정작 박씨는 자신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주변의 칭찬을 쑥스러워하는 편이라고 가족들은 전했다.

 

막내딸 고혜정씨는 “어머니는 그저 여가를 보내려고 시작한 일인데 주변에서 칭찬할 때마다 부끄러워하고 부담스러워하신다”며 “자녀들 입장에서는 그 나이에도 꾸준히 붓을 놓지 않고 작품 활동을 이어오신 어머니가 무척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어머니에게 추억이 많은 공간에서 작품을 선보이게 돼 더욱 뜻깊다”고 덧붙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2005년 3인전 ‘삼우전(三友展)’과 2015년 첫 개인전 ‘흔적’, 2023년 두 번째 개인전 ‘자연을 품다’에서 선보였던 대표작을 시기별로 만날 수 있다. 꽃과 새, 나무와 물고기 등 자연을 소재로 한 문인화에 더해 그림의 주제와 의미를 담은 화제(畵題) 글씨도 함께 전시된다.

 

작품에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화풍의 변화도 나타난다. 2005년 작품에는 자연을 통해 마음속 이야기를 표현하려는 시도가 담겼다. 2015년에는 한층 힘 있는 붓질과 밝아진 색채가 두드러졌다. 2023년에는 큰 화폭을 다루기 어려워지면서 작은 작품 위주로 작업했지만, 붓의 움직임은 오히려 더욱 자유로워졌다.

 

박씨는 이번 전시에 작품을 손보지 않고 그대로 내놓기로 했다. 그는 “전시 작품들은 잘된 것도 있고 서툰 것도 있다.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내어놓았다”며 “제가 지나온 길”이라고 말했다. 완성도 높은 작품만을 골라 보여주기보다 자신이 걸어온 시간과 창작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관람객과 나누겠다는 뜻이다.

 

‘예순에 든 붓, 서른 해의 기록’은 15일부터 18일까지 나흘간 열린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마지막 날은 오후 4시까지다. 관람료는 무료다.

 

방콕에 이런 곳이? 인도·중국·말레이 문화 여행

를 사용하는 한국과 달리 여러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다양한 민족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문화가 뒤섞인 풍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여행의 재미는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가 한 도시의 일상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살펴보면 여행의 깊이도 달라진다. 태국의 수도 방콕은 이런 매력을 발견하기 좋은 도시다. 태국은 미얀마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타이족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지만 중국계와 말레이계, 인도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도 함께 살아간다. 따라서 방콕을 여행하면서 태국 고유의 문화만 경험하기보다는 여러 공동체가 만들어 낸 종교와 음식, 거리 풍경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이 도시를 이해하는 방법이다.방콕에서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싶다면 아침을 파후랏의 시크교 사원 스리구루싱사바에서 시작해 볼 만하다. 이곳에서는 국적과 종교,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방문객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하는 시크교 전통인 ‘랑가르’가 이어진다. 특별한 축제나 행사가 있을 때만 마련되는 식사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음식을 나누는 전통이라는 점이 특징이다.사원에 들어서려면 입구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 1층에서는 사람들이 카펫 위에 앉아 아침 기도를 하고 있다. 잠시 기도 공간의 분위기를 느낀 뒤 식사가 제공되는 2층으로 올라가면 방문객들을 위한 음식이 준비돼 있다. 메뉴는 담백한 로티 빵과 콩·감자로 만든 카레, 코코넛 밀크 소스 등이다. 달콤한 밀크티까지 받아 바닥에 앉아 먹는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나누는 모습은 시크교가 중시하는 평등과 나눔의 가치를 보여준다.처음 찾아온 여행객에게도 정성껏 음식을 내어주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식사 후 설거지를 돕겠다고 제안해도 일손이 충분하다며 사양할 만큼 방문객을 맞이하는 분위기도 자연스럽다. 사원을 방문할 때는 성별과 관계없이 머리에 작은 두건인 루말을 착용해야 한다. 파후랏 일대를 둘러본다면 힌두교 사원인 스리마하마리암만도 함께 방문해 볼 만하다. 시크교 사원과 힌두교 사원은 공간을 꾸민 방식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 종교문화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파후랏은 인도계 공동체가 형성돼 있어 ‘리틀 인디아’로도 불린다. 과거에는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 불편했지만 2019년 지하철 삼욧역이 개통되면서 접근성이 나아졌다. 인도 전통 의상과 향신료, 각종 소품을 구경하는 것도 즐겁지만 이 지역을 제대로 경험하려면 현지 음식점에 들러보는 것이 좋다. 화덕에서 구운 난과 향신료가 풍부한 카레, 탄두리 치킨을 비롯해 여러 음식을 한 쟁반에 담아내는 ‘탈리’는 인도식 한 상 차림에 해당한다. 식사 후에는 달콤한 인도 과자를 차와 함께 맛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다.파후랏에서 조금만 걸으면 방콕의 대표적인 차이나타운인 야오와랏이 나온다. 지하철로도 한 정거장 거리다. 18세기 후반부터 형성된 이 지역은 중국계 공동체의 역사와 음식문화가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중국의 설 명절 무렵이면 거리가 축제 분위기로 바뀐다.태국의 중국계 이민자 가운데는 광둥성과 푸젠성, 하이난성 등 중국 남부 출신이 많다. 이들은 낯선 땅에서 종교시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 왔다. 야오와랏의 중심에 자리한 중국 불교 사원 왓망콘카말라왓은 이러한 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태국 사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 양식과는 달리 중국 남부의 영향을 받은 건물에 용과 봉황을 장식하고 붉은색과 황금색을 활용했다. 사원에서는 향을 피우고 기도하며 복을 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차이나타운의 매력은 종교시설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변에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중국 음식점과 현대적인 감각을 더한 식당이 함께 자리한다. 일부 딤섬 전문점은 전통 음식을 세련된 담음새로 선보여 마치 애프터눈 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두유와 두부를 활용한 디저트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음식의 맛은 물론 공간과 플레이팅까지 즐길 수 있어 미식과 사진 촬영을 함께 즐기는 여행객에게도 흥미로운 장소다.야오와랏의 분위기는 해가 질 무렵 더욱 생생해진다. 거리 곳곳에서 테이블과 의자가 나오고 노점이 이어지면서 밤시장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숯불 위에서는 해산물이 익어가고, 중국어와 태국어가 뒤섞인 간판에는 붉은 네온 조명이 켜진다. 여러 언어와 음식, 사람들의 움직임이 한데 어우러지는 풍경은 방콕의 밤을 특별하게 만든다.방콕에서는 말레이계 공동체의 문화도 만날 수 있다. 태국 남부와 말레이시아 북부는 역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이 지역의 역사적 배경은 오늘날 태국 남부에 말레이계 무슬림 공동체가 자리 잡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방콕 지상철 랏차테위역 인근의 다룰아만모스크는 이슬람 문화와 지역 공동체의 일상을 살펴볼 수 있는 장소다. 이곳에서는 태국어와 말레이어를 사용해 예배하며, 금요일이면 주변의 할랄 음식 노점과 식당을 찾는 사람들로 활기를 띤다.음식은 말레이계 문화를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코코넛 밀크 향이 감도는 밥에 여러 반찬을 곁들인 나시르막은 대표적인 말레이시아 음식이다. 인도식 카레와는 다른 풍미의 말레이식 카레, 쫄깃한 로티 빵, 거품을 풍성하게 내 만든 밀크티 테타릭도 맛볼 만하다. 같은 아시아 음식이라도 지역과 공동체에 따라 재료와 조리법, 맛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방콕에서는 하루 동안 여러 문화권의 생활상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아침에는 시크교 사원에서 음식을 나누고, 낮에는 파후랏의 인도계 상점과 식당을 둘러본 뒤 저녁에는 차이나타운의 야시장을 즐길 수 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 말레이계 무슬림 공동체의 음식과 종교문화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방콕의 매력은 화려한 사원이나 북적이는 시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오랜 시간 공존하며 도시의 일상 속에 녹아 있다는 점이야말로 방콕 여행을 한층 풍성하게 만드는 요소다.